프로이센
동유럽 각국의 절대주의체제 확립의 성공여부는 이후 각국가의 세력관계를 반영했다. 가장 성공적이었던 국가는 프로이센이었다. 16세기 독일은 종교개혁으로 말미암은 장기간의 분쟁, 지방분권적인 할거주의, 경제중심지의 대서양 연안으로의 이동 등, 정치·경제적으로 쇠퇴의 길을 걸었다. 또한 30년전쟁으로 크게 황폐해졌으며, 각 영방국가의 주권이 확립되어 통일국가로서의 발전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독일의 영방국가 중 가장 급속히 발전한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빌헬름 1세(1713~1740) 때 프로이센은 유럽의 강대국으로 발전할 토대가 마련되었다. 그는 국가기구에 대한 왕이 통제를 강화하고 관료조직을 합리화하였으며, 상비군을 배로 늘리고 철저하게 훈련시켰다. 왕은 군대에 대해서만은 돈을 아끼지 않았으나, 그 밖의 일에 있어서는 인색하였고, 근검절약을 신조로 국고의 충실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아들 프리드리히 2세(1740~1786)는 능률적이고 충성스러운 관료조직과 풍부한 재정, 그리고 기강이 엄하고 잘 훈련된 군대를 물려받게 되었다. 그는 오스트리아 왕위계승전쟁에서 슐레지엔을 획득하고 7년전쟁으로 슐레지엔영유를 확인하고 전쟁을 종결시켰다.
7년전쟁으로 프로이센은 강대국으로서의 지위를 굳히고 전후에 프리드리히는 복구작업에 전념하였다. 피해가 심한지역에 세금을 면제하고 농민들에게 농기구와 종자를 무상으로 배급하고 운하, 도로, 교량을 건설하고 소택지를 개간하고 새로운 촌락을 건설하여 신앙에 관계없이 수많은 이주민을 유치하였다. 그는 또한 공업을 육성하기 위하여 관방학(Kameralismus)이라고도 부르는 중상주의정책을 실시하였다. 즉, 보호관세를 설치하여 수입을 억제하고 수출증대와 자급자족을 위하여 낙후된 산업의 보호육성에 힘썼다.
그리고 고문을 없애는 등 사법개혁을 단행하는 한편, 상비군을 증강하고, 제 1회 폴란드 분할로 서프로이센을 획득하여(1772)영토를 통합하였으며 프로이센의 인구는 그의 즉위당시의 약 300만에서 500만으로 증가하였다.
프리드리히는 음악을 좋아하고 시를 썼으며 계몽사상, 특히 볼테르를 흠모하고 그의 영향을 받아 계목전제군주로 자처하였다. 그는 젊어서 <反마키아벨리論>을 저술하였으나 그의 외교와 군사행동은 마키아벨리즘의 표본이나 다름없었고, 그의 본질은 가부장적인 성격을 지닌 전제적인 절대군주였으며, 프로이센은 군국주의적인 관료제적 절대왕정 국가였다.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의 절대왕조는 마리아 테레사(Maria Thresa: 1740~1780)와 요제프2세(Joseph: 1780~1790) 때 그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미인이면서 신경질적인 테레사는 거국적인 군대를 만들고 초, 고등학교를 확장하였으며, 지나친 국력강화정책으로 교회의 세력은 약화되었지만 가톨릭의 도덕은 존중되었다. 여왕은 잃어버린 슐레지엔을 보충하기 위하여 폴란드분할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마리아 테레사의 개혁정책은 그녀의 아들인 요제프2세에 의해 연계되었다. 그는 프랑스 철학자들의 사상에 감동되어 정의와 이성의 이상에 따라 그의 제국을 재건하려고 하였다. 그는 교회토지와 수도원을 몰수하여 교회세력을 줄이려고 하였으며 유대인과 이교도들에게도 가톨릭과 동등한 특권을 부여하려고 시도하였다. 그리고 그는 더 나아가서 귀족을 누르고 일반인들을 높여주었다. 그는 특히 농노들로 하여금 봉건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인이 될 수 있는 칙령을 공포하였다. 그는 이 외에도 교육을 보편화하고 귀족들에게도 세금을 물리려고리 하였다. 그러나 그의 광대한 계획들은 거의 대부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요제프2세는 외국과의 전쟁에서도 패하여 귀족과 승려의 신임을 잃었으며 특별히 자치권을 찾으려는 헝가리인의 거센 반발을 받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리고 그는 무리한 군무강압으로 농민들로부터도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가장 훌륭한 의도를 가졌으나, 하려고 한 모든일에 성공하지 못한 요제프 2세가 잠들다”라고 묘비명을 작성하였다.
러시아
17세기를 통하여 러시아는 유럽과 아시아의 경계선에서 강대국으로 성장하고 있었으나 아직도 국민의 대다수가 문맹이고, 아시아적인 성격이 강한 후진지역으로서 유럽세계와는 직접적인 접촉이 없는 별개의 세계로 성장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도 유럽상인의 왕래는 있었으나 유럽과의 직접적인 거래의 문호는 백해의 아르한겔리스크뿐이었고 정치적으로는 스웨덴과 폴란드가 러시아의 유럽으로의 진출을 완강하게 가로막고 있었다. 이러한 러시아가 유럽국가로 등장하게 되는 것은 표트르대제(Peter the Great, 1682~1725) 때의 일이다.
그는 러시아인들의 생활 방식을 근본적으로 뜯어고치려고 하였다. 그는 여성들의 동양적 은둔습성을 금하고 옷도 남녀 모두 유럽식으로 바꾸도록 명령하였다. 그는 궁정에서의 흡연을 강요하고 많은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수염을 깎았다. 그는 절대왕권을 강화하기 위하여 모든 지방의 자치제의 흔적들을 없애고 국가경찰제도를 만들엇으며, 그리스정교의 수장권을 폐지하여 그 자신의 종교회의 아래 두었다 그는 서유럽의 과학과 기술에 관심이 깊었으며 조선업과 산업을 배우기 위하여 네덜란드와 영국에 자주갔다. 그는 서유럽국가들의 중상주의정책을 모방하여 농업, 제조업, 상업 등을 장려하였다. 또한 “서유럽의 창문”이 되기 위하여 발트해연안 지역을 정복하였으며(북방전쟁1700~1721), 북방전쟁에서 승리한 러시아는 니스타드(Nystad)조약에서 카렐리아, 잉그리라, 에스토니아 및 라보니아를 획득하여 서방으로의 창문을 얻게 되었다.
포트르는 두 번째 유럽여행(1716~1717) 후 중앙과 지방의 행정 및 관료기구를 개혁하였다. 그이 부재 중 권력을 대행할 9명으로 구성된 원로원을 창설하고 9개의 부서를 마련하여 국무를 관정하였다. 병사구를 전국에 설치하고 그것을 토대로 지방행정구역이 마련되었으며 지사가 임명되어 중앙의 비능률적이었던 수많은 기능이 지방으로 이양되었다. 귀족계급은은 물론이고 일반 지주층(젠트리)도 국가에 대한 봉사가 요구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완전히 황제에게 종속하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 다음으로 유명한 러시아 절대왕조의 군주는 독일황녀로 있다가 결혼에 의해 러시아군주가 된 예카테리나 2세(Ekaterina: Catherine 1762~1796)였다. “게몽군주”로 알려진 예카테리나 2세는 프랑스의 철학자들과 친했으며 예술가와 문필가를 격려하고 병원, 고아원 건립에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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