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씽씽의 역사자료실

최초로 외국인 태극장을 받은 외국인 호머 헐버트



안녕하세요.


일제강점기 때 우리나라 사람이 아닌 푸른눈의 외국인이 우리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독립을 투쟁한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미국인이 있어서 소개하려고 합니다.



이름은 Homer Bezaleel Hulbert 이고 호머 B. 헐버트 혹은 헐버트라고 부릅니다. 호머 헐버트는 미국 버몬트 출신의 선교사입니다. 1863년 1월 26일 출생으로 1949년 8월 5일에 향년 86세로 돌아가십니다. 한국 이름은 헐벗, 흘법, 할보 세가지로 불렸습니다.





 1886년에 미국 버몬트 출신 선교사가 우리나라에 어떻게 들어 왔느냐? 그것은 조선 정부에서 육영공원의 영어교수로 초빙했기 때문입니다. 





육영공원은 영재를 육성한다는 뜻으로 정부에서 양반 고위 관리의 자제들을 근대화 교육을 시킨 최초의 관립 근대학교입니다. 이곳에 영어 교육 담당으로 호머 헐버트가 초빙됩니다.



그는 육영공원에서 영어교육을 담당하는데 학생들이 고위 관리 자제들이다 보니 수업태도가 불량하자 고종에게 근대화 교육의 심각성을 상소로 올린 것으로 유명합니다.



또한 호머 헐버트는 자신이 한글에 능숙해야지 영어교육과 근대화 교육이 잘 이루어질수 있다고 보고 3년동안 한글을 공부해서 세계의 지리와 문화를 한글로 사민필지를 저술합니다.





사민필지는 호머 헐버트가 쓴 한글 최초의 세계지리 교과서로 지구, 유럽, 아시아, 아메리카, 아프리카의 지리와 문화를 다루고 있습니다. 외국인이 머나먼 한국에 와서 그들을 교육하기 위해 본인이 한글을 공부해서 한글로 책을 저술했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나요?




또한 1896년 악보도 없이 입에서 입으로 구전으로만 전해오던 아리랑을 최초로 악보로 기록한 것이 바로 호머 헐버트입니다. 이 또한 놀랍지 않나요?





이렇게 육영공원에서 선생으로 지내다가 일제의 침략이 점점 본격화되면서 조선이 점점 힘들어 지자 호머 헐버트는 조선의 정세에 관심을 갖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는 정치와 외교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고종의 믿음을 얻어내어 최측근의 자리에 오릅니다.



호머 헐버트는 조선에 대한 일제의 만행을 세계에 알리는데 노력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헤이그특사의 사전작업도 모두 호머 헐버트가 했습니다. 헤이그 특사는 이준, 이상설, 이준위 3명이 고종의 밀서를 받아 일제의 조선지배의 부당성을 알리기 위해 네덜란드 헤이그에 파견했던 사건입니다. 




호머 헐버트는 헤이그특사 3인과 더불어 제 4의 특사로 일본 특사로 가장하여 헤이그에 침투해 헤이그 특사들을 도왔습니다. 이 사건으로 일본이 빡쳐서 호머 헐버트를 조선에서 추방하지요. 미국에 가서도 조선의 독립과 일제의 부당한 지배에 대해 세계에 알리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I would rather be buried in Korea than in Westminster abbey(나는 웨스트민스터 성당보다 한국에 묻히길 원하노라)"




호머 헐버트는 1949년 7월 29일에 광복절을 맞아 국빈으로 한국에 초청됩니다. 그는 미국에서 한국으로 출발하는 배에서 기자들에게 위와 같이 한국에 묻히길 원한다고 말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86세의 고령에 한달 가끼이 배를 통한 여행이 힘들었는지 한국에 온 지 일주일 만에 돌아가시게 됩니다.  





그는 외국인 최초로 건국훈장 태극장이 수여되었고 장례식도 최초의 사회장으로 치러졌습니다. 그리고 양화진외국인선교사 묘지에 묻혔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우리나라를 사랑한 푸른 눈의 외국인 호머 헐버트! 저도 얼마 전에 알게되어서 미리 알지 못한 것이 매우 부끄러웠습니다. 정말 감사한 분이죠. 이글을 읽는 분들은 꼭 호머 헐버트 이름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상으로 호머 헐버트 Homer Hulbert에 대한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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