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도시의 성립
라틴어로 쓰여진 중세의 사료에서 도시는 키비타스(Civitas)로 표기되고 있다. 따라서 중세도시는 개념상으로 로마도시인 키비타스와 결부되어 말해지고 있다. 그러나 로마도시와 중세도시 사이에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로마도시는 제국의 지배권 범위 내에서 독자적이 입법권을 가진 자치적 행정 단위였다.
그러다가 게르만족의 침입으로 키비타스의 규모와 인구가 크게 축소되면서 로마도시들의 중요성이 주교들이 거주하는 교구의 중심지로만 국한되었다. 그리고 카롤링 시대의 키비타스들은 군사적, 행정적, 종교적 중심지에 불과했다.
이 시대의 키비타스들은 성직자나 기사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도시의 주민이라 말할 수 있는 구성원이 존재하지 않았고 상업이나 수공업도 발달하지 않았다.
반면에 중세도시는 11-12세기에 상업부활이 일어나자 키비타스나 성에 상인들이 모여들고, 성벽 바깥에 자신들의 정주지를 건설하면서 상업의 중심지로 발달하면서 성립되었다. 키비타스나 성은 교역로에 위치해 있거나 적어도 방어시설을 갖춘 곳이었고 그 안은 상인들이 정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공간을 갖추지 못해서 상인들은 성벽 바깥에 따라 자신들의 정주지를 쌓게 된 것이다.
이렇게 새로이 건설된 도시는 바깥에 물길을 만들거나 울타리를 쳐서 약탈자의 침입을 막앗다. 뒤에 해자나 울타리는 석조성곽으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상인들의 정주지를 신도시 또는 외곽도시라 했고, 11세기 초 이후 그 주민에 대해서 부르주아지(Bourgeois)라는 호칭을 쓰게 되었다. 즉, 중세의 도시는 상업을 위하여 성립된 것이었다.
성벽은 도시를 요새로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하나의 특수한 영역으로 만들었다. 그 안에는 영주계층이 지배하는 질서와는 전혀 다른 특수한 도시법을 토대로 고유한 질서가 창출되었다.
또한 도시민은 폭넓은 법적 평등을 누렸고 자유로운 시민계층은 도시 영주에 대항하여 도시 행정과 통치의 결정과정에 참여하는 한편, 자치를 부르짖었다. 성벽으로 둘러쳐진 중세도시는 자유롭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거주지 이전의 자유와 사회적 유동성이 더욱 심화되고 또한 직업적 분화가 이루어졌다.
상인은 도시민 가운데 핵심적 지위를 차지하였다. 상인들은 시참사회를 통하여 도시의 운명을 결정하였다.
에디트 엔넨, 『도시로 본 중세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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