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만족의 사회구조 및 경제구조 2편
카이사르 시대의 게르만인들은 농경과 목축, 수렵 등을 경제생활로 하였다. 농격은 그들이 아직 유목민이었던 관계로 제한적이었고, 주로 목축과 수렵, 그리고 전쟁에 대한 수탈로 경제생활을 영위하였다. 농경과 목축에 관련된 일들은 여성들과 노약자들이 주로 담당했다.
게르만족 사회구조에서는 처음에는 농경기술이 낮아 황무지를 옮겨가면서 경작하는 조방적인 이동식 농격이 시행되었다. 또한 게르만 인들은 대부분의 생산용구와 생활도구들을 각 가정에서 자급자족하였다. 소금, 모피, 호박 등 극히 일부의 물폼만을 교역했을 뿐이었다. 이러한 낮은 수준의 생산력으로 게르만족 사회구조는 평등한 사회적 관계가 유지되었다.
정착생확은 전투보다 농격에 열의를 쏟게 되는 원이인고, 사유지를 인정하면 빈부격차가 생긴다. 빈부격차는 추위외 더위에 대해 쾌적한 집을 가진 자와 갖지 못한 자를 낳게 된다. 그러므로 그들은 사회 불안과 금전에 대한 집착이 비교적 적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평민 계급도 큰 불만을 느끼지 않고 평온하게 상았다고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에서 평가하고 있다.
이런 활동과 더불어 성인남자들의 약탈활동도 경제구조에 큰 비중을 차지했다. 약탈 활동은 용기있고 유력한 자를 중심으로 젊은 전사들로 조직된 코미타투스(comitatus)라고 불리는 무장종사단 형태로 이루어졌다. 코미타투스는 가족 구조와 상관없었고 친족과 종족ㅇㄹ 초월하여 구성된 전사집단이었다.
코미타투스는 젊은 전사들이 유능한 수장과 사적인 결합관계를 맺고 그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군사적 봉사를 제공하고, 이에 대해 수장은 전사들에게 무기, 식량, 의복 등을 제공하며 전사들을 이끌고 승리를 거두어 전쟁에서 획득한 약탈물을 분배해주는 의무를 지닌 쌍무적 주종관계였다. 다시말하면 코미타투스는 사회구조와 경제구조를 결합한 쌍무적 관계였다.
전투를 하게되고 이에 부하가 대장의 용감함을 능가하게 되면 대장에게는 치욕이고 부하에게는 대장과 동등하게 용감하지 못한 것에 대한 불명예로 간주된다. 전투엣 대장은 죽고 본인은 살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은 명예 훼손적이며 평생의 비난거리이다.
대장을 방어하며 보호하고, 자신의 영웅적인 행위도 대장의 명성에 포함시키는 것이 부하들이 충성을 서약하는 가장 중요한 의무 주으이 하나이다. 대장은 승리를 위해서 싸우고 부하는 자기 대장을 위해 싸운다.···(생략)… 게르만족에게는 평온함과 달갑지 않을뿐더러 게다가 위험한 순간에 쉽게 명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 큰 부대는 올지 폭력과 전쟁으로만 지탱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즉 부하들은 대장의 호의에 따라서 유명한 전투용 말, 피비린내 나는, 그리고 승기를 가져다주는 창을 받기를 기대하나다.
간단하지만 그러나 결코 인색하지 않게 제공되는 매일의 식사가 봉급으로 인정된다. 풍부하게 하사할 수 있는 물품은 전쟁이나 약탈을 통해서 얻게 된다.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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