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씽씽의 역사자료실

게르만족의 사회구조 및 경제구조 - 1편



게르만족은 민족 대이동 전에 그들의 기록을 남겨놓지 않았다. 그래서 게르만의 생활상은 그리스인과 로마인들의 기록에 의존하여 알 수 있다. 특히 로마시대의 대표적인 문헌인 카이사르(기원전 100~44년)의 『갈리아 전기』와

타키투스(55~120년경)의 『게르마니아』를 통해 초기 게르만 사회의 모습을 알 수 있다.



우선 경제구조에 대해 살펴 보면 민족 대이동 전의 게르만족 토지제도는 공유제였다 게르만족 사회는 씨족을 중심으로 경제활동이 이루어지는 원시공동체에 가까운 사회였다. 점차 경제적 단위로서 씨족의 역할이 약회되어가자 토지는 여전히 공유제이면서도 정기적으로 대가족 단위로 재분배되어 경작되었다. 






이는 완전한 의미의 공동소유라는 의미가 아니라 대가족에 의한 개별소유의 바탕 위에 공동경작지가 별도로 존재하는 경제구조를 띠고 있었다. 그리고 밑의 사료를 보면 상속에 대해 언급되어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게르만 사회에서는 어느 정도 사유지 개념이 존재하였던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느슨한 경제구조라고 볼 수 있다.



게르만족은 농경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주로 우유와 치즈 그리고 고기를 먹었다. 그들 어느 누구도 일정한 토지나 자기 영지 따위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령이나 유력자는 부족이나 함께 사는 가족들에게 해마다 적당한 토지를 나누어 주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습관에 젖어 전쟁에 대한 열의를 농경에 쏟지 않도록 하였고 또 넓은 영지에 대한 열망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카이사르, 『갈리아 전기』




상속자는 어느 누구든지 사망자의 자식이고 사망자는 유언서라는 것을 작성하지 않는다. 만약 자식이 없는 경우 상속에 있어서 최초의 단계는 형제이고, 다음으로 부계의 백부나 모계의 백(숙)부였다.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이 토지는 공동체의 구성원인 자유민에 의해서 직접 경작되었다. 물론 게르만족 사회에도 노예는 존재했다. 그러나 그들은 로마의 노예와는 달랐다.게르만의 노예는 독립돈 가족생활을 영위하면서 주인에게 밀이나 가축 또는 피륙으로 된 약간의 현물을 바치고 심한 체벌도 받지 않았다. 



게르만족의 사회구조의 일면을 살펴보자.게르만족의 노예가 일면적으로 로마의 소작농과 비슷하다 하더라도 그들은 사실상 노예였다. 심하지는 않았지만 그들 역시 구타와 속박을 받았고, 주인의 기분에 따라 팔려가거나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또한 그들은 가축과 마찬가지로 유산으로 상속되었다. 이동 이전의 게르만족의 노예 숫자는 그리 ㅁ낳지 않았을 것으로 보인다. 게르만에는 대토지소유제의 발당리 미약했고, 지속적이고 방대한 건축사업이나 채광사업이 없었으므로 대규모의 노예집단이 광범위하게 존재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회구조 = 노예제도 



노예들에게는 일반적으로 우리처럼 그 제도 내에서 특정한 과업이 주어지지 않는다. 노예는 각자 대지와 농자으이 책임이 주어진다. 주인은 소작인과 마찬가지로 노예에게서 일정략의 곡물, 가축 또는 모나 마직 천을 요구한다. 


이러한 정도로만 노ㅖ에게 의무가 주어진다. 집안에서의 다른 일은 부이노가 아이들이 담당한다. 노예를 때리거나 쇠사슬에 묶거나 강제 노동시크는 것은 드물다.


타키투스, 『게르마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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