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씽씽의 역사자료실

대헌장의 성립의 배경



1. 프랑스와의 전쟁



존은 아이가 없었던 이자벨과 이혼하고 1200년 앙굴램의 이자벨과 결혼하고 그녀의 이름으로 라 마르쉬백령에 대한 상속권을 주장했다. 앙굴램의 이자벨은 원래 뤼지냥 집안의 위그의 약혼녀였는데, 뤼지냥 집안 역시 라 마르쉬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었다. 





이에 위그가 사건을 그들의 공동의 영주인 필리프에게 제소했고 필리프는 존을 자신의 법정에 소환했다. 존이 출두를 거절하자 필리프는 프랑스 내애서 존이 상속한 모든 영지를 몰수한다고 선언했고 이리하여 존과 필리프 사이에 싸움이 시작되었다.




이퀴텐의 일부를 제외한 프랑스 내의 모든 영토를 읽고 독일 황제와 동맹을 맺고 여러 제후들과 연합하여 필리프를 공격하지만 부빈에서의 패배로 빼앗긴 영토를 회복하려면 존의 소망은 물거품이 되었다. 




2. 교황과의 갈등




캔터베리 대주교였던 휴버트 월터의 죽음으로 새로운 캔터베리 대주교의 선임 문제로 존과 교황은 갈등을 빚게 된다. 존은 그에게 고분고분한 노리치 주교 존 드 그레이가 대주교로 선출되기를 원하지만 캔터배리 수도사들은 그들의 부원장인 레지널드를 선출하여 교황의 승인을 받으려 했다. 






이 소식을 들은 존은 수도사들에게 압력을 가하여 노리치 주교를 선출케 했다.  그러나 왕권에 대한 교황권의 우위를 주장하던 이노센트3세는 스티븐 랭턴을 선출케 했지만 존은 이를 거부하고 랭턴의 잉글랜드 입국을 막았다. 이에 대해 교황은 잉글랜드 내에서의 성무 금지를 명하고 존을 파문에 처했다. 




이에 대하여 존은 반대파 주교와 성직자들의 재산을 빼앗자 다시 교황은 존의 폐위를 선고하고 프랑스의 필리프에게 그 집행을 위임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필리프와 대적하기 위해서는 교회와의 제휴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인식한 존은 굴복하고 랭턴을 대주교로 받아들인다. 다음해 성무금지령이 풀렸지만 성무금지령이 내려진 6년 동안 수도원에서는 존을 폭군이라 비난했다.


그 결과 존 왕은 대헌장에 승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대헌장이 마침내 승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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