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전쟁 - 3차원정 테르모필레 전투 1
마라톤 전투로 일단 물러난 페르시아는 다리우스 왕이 사망하고 아들인 크세르크세스가 기원전 485년 왕이 되었다. 크세르크세스는 완벽한 승리를 위해 전쟁준비를 4년간 더 한뒤에 기원전 480년 봄에 그리스 원정을 나선다.
이렇게 해서 벌어진 3차원정은 마라톤 전투와 3가지가 달랐다.
첫째, 이번에는 페르시아왕이 직접 전투의 총지휘를 맡았다.
둘째, 선박으로 이동했던 1차전, 2차전과 달리 이번에는 헬레스폰토스 해협에 선박들로 다리를 노고 병력을 이동시킨다는 계획을 세웠다.
셋째, 유사 이래 최대 규모의 원정군을 편성하였다. 페르시아, 아시리아, 메디아, 박트리아, 파트리아 등 페르시아의 기본 강역 내에 있는 민족들은 물론 아라비아, 인도 리바아, 에티오피아에 이르기까지 수십 개의 민족들에게 병력을 차출하여 70만의 보병 부대를 편성했으며, 페르시아가 자랑하는 기병은 8만, 페니키아, 이집트, 키프로스를 주축으로 한 함선은 1207척, 수송선은 무려3000척에 달했으니 당시 그리스와 중국을 제외한 문명 세계의 군대는 거의 모조리 동원한 것이었다.
한편 이에 맞서는 그리스에도 1, 2차전과 달라진 점이 있었다. 크레르크세스가 몇 년씩이나 전쟁 준비를 해오고 있다는 점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 그리스인들은 누구나 페르시아가 다시 침범해오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폴리스 특유의 분열은 극복하지 못했다.
이미 페르시아의 편을 들었으므로 안심하는 폴리스도 있었고 페르시아의 위명에 질려 애초부터 싸우기를 포기하는 폴리스도 있었다. 게다가 마라톤의 영웅 밀티아데스는 금을 구하기 위해 파로스 섬 정벌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병사한 상태였다.
3차전은 병력의 차이가 너무 커서 전략이 중요했다. 밀티아데스가 탁월한 전술로써 마라톤 전투에서 이겼다면, 이제 아테네에는 탁월한 전략가 테미스토클레스가 있었다.
밀티아데스의 정적이었다가 그의 죽음으로 기원전493년 아르콘에 오른 테미스토클레스는 그리스가 생존하려면 해군을 육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앞서 두 차례의 전쟁에서 페르사아 함대가 에게 해를 무사통과했으니 당연한 주장이었다.
그리스는 일찍부터 해상 무역을 발달시켰음에도 불구하고 해군은 염두해 두지 않았다. 선박은 어디까지나 무역용이었고 기껏해야 군대의 수송용이었다.
그러나 그는 줄기차게 해군력을 강화하자는 주장을 되풀이 했고 집권하자마자 즉각 군함 건조에 나섰다.
기원전 483년 아테네에 새로운 은광이 발견되었다. 테미스토클레스는 은광에서 나오는 100달란트의 수입을 시민들에게 똑같이 분배하자는 주장에 반대하고, 이를 신형 삼단노선을 건조하는데 쓰도록 주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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