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르시아 전쟁 2차 원정 - 마라톤 전투
기원전 490년 그리스 세계를 정복하기로 작정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왕은 아테네 북동쪽 약 25마일 지점인 마라톤에 상륙했다. 어느 나라의 역사에나 반역자는 등장하지만 이 때 아테네에서 추방된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의 아들 히피아스가 페르시아군의 길잡이 역할을 했다.
아테네는 절망적 위기에 처했으나 다른 폴리스의 도움 없이 처절한 투쟁으로 마라톤 전투를 승리로 이끌어 내어 아테네와 그리스 세계의 독립을 지켰다. 밀티아데스의 지휘 하에 애국심에 불타는 아테네 시민의 중장보병의 밀집대는 페르시아 군을 격퇴하였다.
이 승리의 소식을 시민에게 전하려고 사자 필리피데스는 있는 힘을 다하여 아테네로 달렸고 마로톤 경주는 이에 유래하였다. 중장보병의 밀집대 전술은 이미 기원전 7세기에 나타났으나 기우너전 6세기 후반에 아테네에서는 무겁고 값비싼 청동제 흉갑 대신에 마나 가죽 또는 금속 등의 장점을 살린 가볍고 값싼 복합형의 흉갑이 발명되고 작은 모자 비슷한 헬멧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농촌이나 동시의 중산하층도 스스로 부담하여 무장을 할 수 있게 되고 밀집대의 견고성에 기민한 기동성이 첨가되었던 것이다. 마라톤의 승리에 있어 이 달리는 중장보병의 역할은 컸다.
이 전투를 통해 밀티아데스의 중장보병정책은 성공적임이 입증되었다. 마라톤 전투에서 승리한 뒤 밀티아데스 장군은 능숙한 지휘력으로 아테네를 위험에서 그한 위대한 인물로 존경받았다.
아테네인들은 마라톤에서의 승리로 전쟁이 끝났다고 생각했으나 후에 3차 페르시아의 원정을 아테네의 승리로 이끈 장군 테미스토클레스는 이것이 단지 더 큰 전쟁의 서곡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았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이 때 스파르타가 취한 태도였다. 마라톤에 상륙한 페르시아군의 목표는 물론 아테네 정복에 한정되지 않았다. 페르시아는 전체 그리스세계를 목표로 삼았다.
아테네 다음에는 스파르타 차례였다. 그러므로 아테네만이 아니라 스파르타도 포함되는 그리스 세계 전체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이했던 것이다. 스파르타는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아테네를 지원하지 않는 것은 스파르타의 멸망으로 이어질 수 있었지만 원군을 보내 아테네가 승리케 하는 것은 경쟁국 아테네의 강성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스파르타로서는 그 어느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원군의 파병문제로 국론이 분열된 스파르타가 격론을 벌이고 있던 중에 아테네가 페르시아 군을 격파하여 전쟁이 끝났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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