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씽씽의 역사자료실

태조 왕건의 정책 


1. 호족 연합 정책


(1) 혼인 정책: 유력한 호족의 딸들을 왕비로 맞아들임. 6명의 왕후, 23명의 부인을 두었다. cf. 지방호족의 딸과 결혼을 했는데 청주는 친궁예 세력이라 그런지 혼인한 적 없다.

cf. 자식 간에도 혼인 시키기도 했다-_-.

 


혼인 문제: 왕건이 다수의 유력한 호족의 딸들과 결혼하고 죽은 뒤 혜종이 즉위하였으나 그의 왕권은 미약하였다. 태조와 딸의 결혼을 성사시킨 왕규는 혜종에게도 딸을 바쳤다. 후에 왕규가 자기 외손을 왕위에 앉히려고 난을 일으켰다가 왕식렴에게 진압되었다. 혜종 후에 정종의 즉위 후에 광종이 즉위하였다.



(2) 사성(賜姓) 정책: ‘왕씨성을 하사하여 의제적인 가족 관계를 형성하였다.

ex: 왕순식, 왕규도 사성일 것으로 추정, 왕가도, 왕봉규



(3) 사심관 제도와 기인제도


사심관 제도: 자기 출신의 지방에 파견하여 행정을 맡겨 관리하게끔 함. 부호장 이상의 관리를 자치적으로 지배할 수 있는 관직이었다.

- 목적: 지방호족에게 그들의 연고권을 주고 지방을 통제하게 만들었다. 후에는 지방감시의 역할로 그 역할이 변하였다.

- ex: 신라의 경순왕은 경주를 맡음

 

고려시대의 호장은 토착지방 관리의 우두머리.

- 조선시대의 향리는 양반이 아닌 중간계층이었으나 고려시대의 향리는 호족연합 정치의 특성으로 지방과 중안 간 향리의 차이가 크지 않았다.



기인제도: 지방 세력의 자제를 중앙으로 불러들여 인질로 삼아 지방의 반란을 억제코자 했던 제도. 신라에서 고려 이후까지 존재하였다.

- 초기에는 왕과 호족 간 상호 호혜적인 성격이 강하였다.

(왕의 입장에서는 지방을 감시하기 위한 제도였으나 호족의 권리가 그렇게 약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유리한 제도는 아니었다. 호족의 입장에서는 불리하긴 하지만 중앙과 지방을 연결하여 기반을 다지는데 이용하였다.)



(4) 토지 지급

- 호족들에게 역분전을 지급(논공행상적 성격이 강함) 이 토지를 매개로 하여 중앙으로 편입되는 결과를 초래함

- 식읍과 녹읍을 지급하였다. (ex: 후백제의 견훤에게 양주를, 신라의 경순왕에게 경주를 식읍으로 지급한 것)

 


2. 북방 정책 서경 정책

-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신라 왕실의 제도를 물려받았음을 강조하였다.

고구려 옛 영토의 수복의지 강함 실질적으로 추진



(1) 서경(평양) 정책: 북방정책의 전초기지로 사용


(2) 분사 제도: 고려가 서경(西京:평양)에 중앙부서(中央部署)의 분소(分所)를 설치한 제도.

- 개경과 같이 제 2의 수도화 함. 묘청의 서경천도 운동의 배경

- 풍수지리로 인해 고려 정부가 혼란해지면서 천도설이 유행 정종은 풍수지리를 구실로 삼아 서경으로 천도하여 개경의 훈신세력으로부터 벗어나려 하였으나 갑작스레 죽어 실패


(3) 북방 정벌: 청천강 이북 지역을 수복 한반도라는 큰 틀이 이때 형성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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