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씽씽의 역사자료실

과거가 처음 실시된 광종 9년의 제술업에서는 시詩․ 부賦ㆍ송頌ㆍ시무책으로, 2년 후 11년에는 시무책이 제외되고 시ㆍ부ㆍ송만으로 고시하였다. 그러나 성종 15년부터는 광종 9년과 마찬가지로 다시 시무책을 첨가하였다.

 



시와 부는 창작으로 오늘날의 문학에 가깝다. 개인의 창작력을 중시한 측면을 엿볼 수 있지만, 형식에 얽매이고 평가에서도 시관의 주관이 작용하여 공정한 평점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또한 문장 다듬기에만 골몰하고 정치나 사고체계를 소홀히 하는 학풍에 젖게 하는 폐단도 있었다. 시, 부는 거의 모든 시기에 출제되었고, 인종 17년 이후에는 종장에서 출제되기도 하였다.

 


송은 초기에만 실시되고 곧 폐지되었는데, 창접주의 영웅적 경륜이나 상서로운 사실을 찬미하는 문체이다. 그 하나의 예로 광종 9년에는 현학정상이라는 조익의 송이 시제로 출제되었는데 이것은 당시에 잔류토호의 자제들을 회유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귀족화한 중앙호족을 축출하는 과정과 부합되었다. 이러한 성격의 송은 불안정한 왕실의 권위를 높여야 할 건국 초기에 출제되었으나, 고려 중기로 갈수록 필요 없게 되자 폐지되었다.

 


시무책은 시정의 득실을 열거하고 그 해결책을 제시하는 문장으로 개인의 정치적 경륜을 나타내는 실용적인 글이었다. 시무책은 과거에서뿐 아니라 국가가 중대한 시국에 직면하거나 개혁정치가 필요할 때 5품 이상 또는 초야의 지식인까지 포함하여 상소하도록 언로를 개방하였다. 책문을 출제한 동기는 응시자의 답안을 정치수행에 참조하려는 목적이 있었으나 실제로 어느 정도 참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전기에는 시무책으로, 후기에는 책문으로 한 점이 비슷하다. 그러나 시무책은 제한 없는 시정개혁 상소의 형식이고, 책문은 제한된 문제에 따라 작성하는 개혁안이었다. 시무책은 과거에서 응시자의 식견과 당시 사회를 반영하므로 의미가 크다. 책문 또는 시무책은 삼장 중에서 때에 따라 시행 순서가 변화하였다.

 논은 역사적 사실이나 경 가운데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부분에 관해서 주관적인 견해를 첨가하면서 설명을 전개하는 문장이다. 이는 시, 부보다 현실과 밀접한 관계가 있지만, 책문 보다는 대체로 현실에서 거리가 먼 관념적인 글이었다.

 


시행 순서가 바뀐다는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는 인종 17년에 예부禮部 공원貢院에서 범중엄의 견해를 보면 고시출제에 관한 예부 공원의 견해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책문이 인품의 대강을 보여주며, 시ㆍ부가 전인적인 인격을 알려준다고 보았다. 그리고 등급을 정하는 종장에서 시ㆍ부를 좀 더 중요시하자고 주장하였다. 바꿔 말하면 종장을 가장 중시하였다.



 사회의 부조리를 비판하는 시무책이 경시된 까닭은 고려 중기에 문벌이 형성되면서 이들의 자제를 주관적으로 평가하여 상위에 급제시키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장詞章 중심의 학풍은 인종 이후 문벌을 이룬 중앙의 품관 자제가 급제를 독점하게 만들었고, 그만큼 항궁의 진출은 어려워졌다. 결국 사장 학풍의 성행은 응시자가 비현실적인 문학에 탐닉하게 만들었고, 그들은 운을 맞추기에만 열중하게 되었다. 문벌의 형성에 발 맞추어 능력 위주의 과거제도는 약화되었고, 사회신분의 유동도 전보다 폐쇄성을 띠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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