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씽씽의 역사자료실







왕안석(王安石, 1021년 12월 18일~1086년 5월 21일)은 송나라의 개혁 정치가이다. 중국 장시성(江西省) 출신이며 북송 시기에의 시인·문필가로 활약하였다. 자는 개보(介甫), 호는 반산(半山)이다. 신법(新法)이라는 개혁책을 통해 균수법(均輸法), 청묘법(靑苗法), 시역법(市易法), 모역법(募役法), 보갑법(保甲法), 보마법(保馬法) 등을 실시하였다. 하지만 이렇게 개혁하려고 노력했는데도 당쟁이 격화하고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서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그의 개혁 정치는 보수파에 매도되었지만 문장력은 동료와 정적뿐이 모두 인정했을 만큼 뛰어났다. 그는 당송팔대가 중의 한 사람이다.




왕안석의 정치-경제 사상

 

왕안석은 국가가 사회 전반에 걸쳐 제도적 통제를 수립하고 강화함으로써 나라가 더욱 잘 다스려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는 주례가 국가에 의한 통제체제의 전형적인 표본을 보여준다고 보았다. 그러나 고대의 제도를 현재의 상황에 적용시킬 수 있는지의 여부를 생각지 않고 기계적으로 모방하는 것은 잘못을 범할 가능성이 있으니 국가는 고대의 제도를 통하여 풍속의 개선에 필요한 정신과 목표의식만을 계승하면 되며 이를 내용으로 하여 새로운 제도를 수립해야 하겠다는 것이 왕안석의 생각이었다.

또한 왕안석이 느낀 관료들의 가장 큰 결함은 명성을 얻는데 급급한 반면 실무능력과 공리주의적 적성을 결여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가 이상적으로 생각한 관료는 경서의 해석과 국가의 적극적 역할을 위한 경서의 응용, 사려 깊은 정치적 계책, 행정능력, 법에 관한 지식등에 능통한 인물이어야 했다. 이러한 능력은 국가의 다원적 기능에 부응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었다.




그가 생각한 이상적인 재정책은 유가사상가들이 전통적으로 강조해 온 경제시책만으로는 안되며 국가 전체의 생산력을 중대시키고 민의 재력을 안정시키는 여러 시책을 포함하지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즉 국가의 일방적 세입증대가 아니라 백성의 생산력 증대를 위해 국가가 지원하는 방법을 통하여 세입의 증가를 도모한 것이다. 그가 의도한 것은 경제적 성장을 자극하고 조장하기 위한 국가의 재정지원의 범위와 증가된 생산력과 일반적인 번영 속에서 항구적인 세입원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었다.


개혁의 결과 농민과 중소상인들에게는 유리하였지만 기득권계층인 대상인 대지주에게는 치명적이었다. 그래서 기득권 계층에게 큰 반발을 가져왔다. 사대부들이 모두 대상인 대지주 출신이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사마광이었다. 왕안석의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구법당이라하고 그대표가 사마광이었다. 반대로 왕안석의 정책을 찬성하는 입장은 신법당이라 하였다. 


황태후와 구법당들의 지속적인 왕안석 퇴진운동을 통해 신종이 잠시만 떠나있으라 명하여 왕안석은 관리에서 물러나 은거하게 된다. 이후 남은 신법당은 구법당에게 저항을 받으며 약해져 갔고 나중에 왕안석이 복직하지만 얼마안가 다시 은거하게 된다.


신종 사후에 황태후와 구법당이 권력을 잡고 왕안석이 시행했던 모든 정책을 폐지한다. 그리고 신법당들도 모두 축출된다.


여기서 사마광에 대해 짤막하게 살펴본다면 사마광은 자치통감의 저서로 유명하다. 자치통감은 춘추시대부터 송대이전인 오대십국까지의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 춘추라는 역사서를 기전체가 아닌 편년체로 집필한 것으로 쉽게말해 시간 순서대로 역사를 집필한 것이다. 기전체는 인물별로 집필했다고 생각하면 된다. 그리고 유명한 일화는 소아격옹도이다. 작은 아이가 옹기를 파괴하는 그림이란 뜻이다. 아래그림이 바로 소아격옹도이다. 사마광이 어렸을 때 친구들과 놀다가 친구가 물이 가득담긴 항아리에 빠졌는데 다른 아이들은 어쩔줄 몰라 우왕좌왕 할때 사마광은 큰 돌멩이를 가져와 항아리를 깨 물이 흘러나와 아이를 구했다는 일화이다.


.




이 글을 공유합시다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