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씽씽의 역사자료실

천하를 호령한 유일한 여자황제 측천무후

 

성신황제(聖神皇帝) 측천무후, 즉 무측천(,則天: 624~705)의 본명은 무조(武照), () 고종의 황후였으나 고종이 죽은 후에 황제에 등극하였다. 황제로 16년간 재위하였지만 실제로는 50여년간 집권을 한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자황제이다. 무측천은 황제에 등극한 후에 이름을 (] 아래에 이 있는 글자. 무측천이 새로 만든 글자임)’로 고쳤다.




624(당 고조 무덕<武德> 7) 123일 무측천은 수도 장안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본적은 병주(幷州) 문수(文水: 지금의 산서성 문수)이다. 그녀의 아버지 무사확은 수양제 때 목재상이었는데 수양제의 대형 토목공사 덕택으로 거부가 되었다. 이때 그는 목재 장사를 하면서 권문세족들과 교분을 두텁게 쌓아 하급 군관으로 들어갔는데 617년 당 고조 이연(李連)이 거병을 하자 군수관 신분으로 보좌하여 큰공을 새워 광록대부에 임명되고 14명의 개국공신 행열에 들어가 당왕조의 신흥귀족이 되었다. 그의 세 번째 딸이 무측천이다.


636(당 태종 정관<貞觀> 10) 태종 이세민의 황후 장손씨가 병사한 후, 그 이듬해에 그녀를 황궁에 불러 재인(가무로써 황제를 섬기는 아주 낮은 등급의 후궁)으로 삼았다. 이때 나이 14세의 어린나이였다. 무측천은 황국에 들어간지 12년이 지났지만 자식을 생산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재인의 직위에서 더 이상 올라가지도 못하였지만 오히려 태종의 아들 이치(고종)는 일찍이 태자 시절에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반해버렸다. 태종이 세상을 떠나자 황실의 법도에 따라 감업사의 비구니가 되었다. 이에 고종은 예교의 속박을 벗어 던지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데리고 들어왔다. 이때 그의 나이 28세였다.

무측천은 황후가 된 후 가장 위협적인 존재인 장손무기를 붕당을 만들었다는 죄명을 둘러씌워 외지로 추방한 다음 자살을 강요하였고 그 후 장손무기를 따르는 사람들도 제거하여 후환을 없애고 <성씨록>을 개편하여 자신의 성씨인 무씨(武氏 )를 최상에 놓고 문벌을 중시하던 당시의 사회적 풍토 속에 자신의 가문에 대한 위치를 확고히 해 두었다.

고종은 무측천의 전횡을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어 재상 상관의(上官儀)와 비밀리에 그녀의 폐위 문제를 논의했는데 그 사실이 사전에 들통나고 이 사실을 들은 무측천은 고종에게 달려가 갖은 협박과 회유로 고종을 설득한 후 모든 죄를 상관의에게 둘러씌워 처형하였다.


이 사건 후 측천의 수렴청정이 시행된 것이다. 이로써 정치의 대권은 측천에게 돌아가고 고종은 이를 방관만 하게되니, 천하의 사람들이 고종과 측천을 두고 이성(二聖)’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는 비록 심성이 독하고 수단이 악랄하였지만 정치적으로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일찍이 건언12(建言十二事)’라는 12조의 건의서를 올렸는데, 여기에는 농업발전, 조세경감, 언론확대 등의 비교적 완비된 치국정책이 포함되어 있다. 고종은 이 건의를 받아들여 그대로 시행하라는 조서를 반포하였다. 그 후 고종이 정사를 처리하는 권한을 무측천에게 넘겨주었던 까닭도 바로 그녀의 이러한 정치적 역량을 인정하였기 때문이다. 관리의 등용에도 측천은 문학에 밝은 지식인을 이요하였다. 이는 관롱집단의 몰락과 함께 정치의 중추에 인물이 부족해지자 점차 활발해진 문학, 특히 시를 통해 인재를 구하려 한 조치였다. 과거과목 가운데 진사과 중심 시험과목을 시부(詩賦)에 두게 된 것도 측천 때부터라고 생각된다.


고종의 뒤를 이은 중종을 54일만에 폐위시키고 그의 동생이며 측천이 낳은 예왕 단()24세의 나이로 제위에 올랐다. 예종이다. 그러나 예종은 별전에 거처하여 정치에는 관여하지 않았고 측천이 수렴청정을 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모든 정사를 직접 관장하였다. 낙양을 신도(神都)라 고치고, 관제도 새로이 개편하였다.



이 글을 공유합시다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