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씽씽의 역사자료실

대원군의 대내정책

 



1)서원 철폐와 경복궁 중건

 


조선후기에는 서원이 이미 광범하게 설립되어 국가재정에 역행적 작용을 하고 있었다. 서원에는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면세의 書院田과 군역을 면제 받은 院奴를 비롯하여, 건물의 건축과 수리를 받는 특권이 있었다



이러한 특권 때문에 수많은 서원이 설립되었고 이 서원재산으로 무위도식하는 양반유생이 늘어나며, 서원의 위세로 관민을 협박함 금품을 강요하는 비행이 자행되었다. 이에 대원군은 집권 직후 과다하게 설립된 서원을 제한하는 정책을 행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 정책이 최고조에 달한 것은 고종 8(1871)이었다. 이 해 3월에 마침내 전국의 거의 모든 서원을 철폐하는 명령이 발령되었다. 사액서원으로 마땅히 존속시켜야 할 47개 처만 남기도록 하였던 것이다. 서원철폐 정책의 본질은 지방의 토호권을 약화시키고 그 대신 전제왕권을 강화시키는 것에 있었다. 요컨대 대원군 정권의 향촌 정책의 핵심은 수령-서리로 이어지는 봉건왕조의 공적 권력의 확립을 통하여 사적권력을 배제하고 향촌사회의 운영권을 장악하고자 한 것이다.






대원군 집권 후 심혈을 기울인 다른 한 가지 사업은 임진왜란 당시 불탄 경복궁을 중건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왕실의 존엄을 과시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경복궁 중건은 방대한 예산을 요구하는 사업이었으며, 당시 조선왕조의 재정상태에 비추어 보면 힘겨운 일이었다. 이 공사에 필요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왕실로 부터11만냥을 지출하고 원납전 36만냥을 걷도록 하였다



이어서 일반인들을 사대로 원납금을 염출케 하였다. 총 금액은 1865년부터 18688월까지 약 750만 냥이었다. 또한 당백전을 주조하여 유통시켰다. 명목가치가 실질가치의 1/20에 지나지 않은 이 악화는 약 6개월 동안 총 1600만 냥이나 발행되었다. 당백전은 유통시장에 혼란은 가져와 인플레이션을 유발해서 사회경제적 폐단이 심각해지자 결국 이 화폐발행은 6개월만에 중지되었다



경복궁 중건사업은 농민층의 동요를 일으키는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원납전은 농민들이 지원해서 바치는 것이 아니라 강징되는 것이므로 비난을 받았고 경기지역 농민들은 경복궁 중건에 강제 동원되었다. 고종 5(1868)에 경복궁은 완공되었다.

 





2)제정 군사제도의 개혁

 



대원군은 1862년 임술민란 당시 가장 문제가 되었던 부세제도에 대해서 그 운영을 개선하고 제도를 일부 개혁하였다.

관복(官服)과 서민들의 의복제도를 개량하고 사치와 낭비를 억제하는 한편, 세제(稅制)를 개혁하여 귀족과 상민(常民)의 차별 없이 세금을 징수했으며, 조세(租稅)의 운반과정에서 조작되는 지방관들의 부정을 뿌리뽑기 위해 사창(社倉)을 세움으로써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 국민들의 생활이 다소 안정되고 국고(國庫)도 충실해졌다


, 대원군은 1862(철종 13)에 발생한 임술농민항쟁의 원인을 삼정문란으로 파악하고 삼정을 개혁함으로써 농민의 불만을 수습하려 했다. 우선 전정(田政)에서는 조세지의 확보를 위해 진전(陳田)이나 누세결(漏稅結)을 색출했으며, 문제가 많은 일부 지역에서 양전(量田)을 시행하여 새로운 양안(量案)을 만들고 수세결도 늘렸다.


군정(軍政)에서는 전주민에게 균일하게 세를 부과하는 호포제(戶布制)를 시행했다. 호포제는 양반도 호포세를 내는 것으로 양반의 반대에 부딪혔으나, 결국 시행됨으로써 상민은 부담액이 줄었고 신분적 평등의식도 고취되었다. 환곡문제는 1862년 삼정이정책에서 결정되었던 파환귀결(罷還歸結)이라는 근본적 개혁안을 채택하지 않고,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던 허류곡(虛留穀) 120여 만 석을 탕감하고 

 


재정확보의 차원에서 호조별비곡(戶曹別備穀병인별비곡(丙寅別備穀) 등 새로운 환곡을 마련했다. 환곡의 운영방법을 개선하기 위해 일부 사창제(社倉制)를 도입하여 관리들의 간여를 금지하고 민간에게 운영을 맡겼으나, 고리대화한 환곡의 근본문제를 해결하는 방도는 될 수 없었다


그밖에 국가재정의 부족을 메우기 위해 포량미(砲粮米)를 신설하고, 도성의 문세(門稅)를 징수했으며, 궁방(宮房)이나 포구 주위의 유력자들이 불법으로 부과하던 각종 사세(私稅)를 혁파하고 이를 중앙정부의 재정에 편입시켰다. 또한 경복궁 중건과 병인양요에 소요된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약 16백만 냥 상당의 당백전을 주조하고 청나라 화폐인 청국소전(淸國小錢)을 강제로 유통시켰는데, 이는 물가를 폭등시킴으로써 상민의 생활에 큰 타격을 주었다.

 

 


대원군의 대외정책





대원군이 국내에서는 강력한 <왕권보호>정책을 실시하였다면, 대외적인 정책은 철저한 <쇄국정책>이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은 <통상수교거부정책>으로 표현할 수 있는 강력한 정책이었다. 흥선대원군은 집권초기에 천주교에 관대하였다. 그 이유는 반세도정치 세력들 중에 개화주의자들이 많았고, 대원군 역시 오랑캐로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고래 <이이제이 정책>을 생각해두었기 때문입니다



대원군은 프랑스 선교사들이 천주교를 전파하는 것을 이용하여, 러시아의 남하정책을 저지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선교사들은 정치 불간섭 및 철저한 인도주의적 선교원칙을 주장하면서 흥선대원군의 의도대로 따라주지 않았습니다. 프랑스와의 정치적 교섭은 실패하였고, 흥선대원군은 프랑스인 선교사 9명을 처형하고 천주교를 박해하기 시작한다.(병인박해)



1866년 프랑스는 강화도에 처들어 오는데(병인양요) 강화도는 수도인 한양으로 들어오는 입구뿐만 아니라 문서를 보관하는 외규장각이 있던 섬으로 우리나라의 중요한 곳이다. 프랑스의 침입은 양헌수의 부대를 비롯한 관군이 정족산성 등에서 프랑스군을 격파하면서 마무리 되었다.



흥선대원군은 병인, 신미양요를 겪으면서 강력한 척양정책을 고수하였고, 이 정책에 유생들이 적극적으로 지지하면서 대원군의 권력기반을 확고히 하는 효과를 얻었습니다. 특히 이항로, 최익현 등의 개항반대운동은 대원군 정권의 정통성을 공고히 해주었다 또 서양은 조선의 강력한 저항을 보면서 조선을 독자적인 자주국가로 인정하게 되고, 다른 방향에서의 접근을 모색하게 된다.





실제 유럽열강들은 당시 자국의 국제적인 관계상 조선까지 쳐들어올 적극적인 이유를 찾지 못하였고, 이후 대 조선 정책에 있어서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 나라는 러시아와 일본으로 변합니다. 흥선대원군은 이후 척화비를 전국에 세워 반외세 정책을 확고히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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