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씽씽의 역사자료실

2월 혁명의 영향 -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실패



당시에 "프랑스가 재채기할 때마다 유럽은 감기에 걸린다"는 속담이 유포되고 있었는데요. 플랑스 2월 혁명의 영향이 유럽의 다른 지역으로 신속하게 전파되었기 때문이죠.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순으로 살펴보도록 할께요.





독일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의 실패



포스트리아의 수도 빈과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을 중심으로 발생한 3월 혁명으로 보수반동 체제의 지도자 메테르니히는 축출되고 자유와 통일을 위한 열망이 팽배한 가운데 분열된 독일 영방국가들을 통합하려는 운동은 1848년 5월에 여러 영방국가로부터 온 대표들이 모인 '프랑크푸르트 의회'로 이어졌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통일된 독일이 공화정이어야 하는지, 또는 군주정이 되어야 하는지 그리고 오스트리아를 포함해야 하는지, 또는 배제해야 하는지에 관해 서로 의견이 달라서 실패하였다.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에서는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하는 대독일주의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하는 소독일주의가 대립하였지만 결국 소독일주의를 선택하였다. 





이어 1849년 3월 미국의 연방제도와 영국의 의회 관례를 참작하여 자유주의적인 통일헌법을 마련하였고,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4세를 추대했지만 반동적인 그는 오스트리아의 반발을 우려하여 거절하였다. 


오스트리아는 프랑크푸르트 의회의 취지에 반대했으며 자유주의자들도 의회에서 탈퇴함으로써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해산하고 말았다. 그 후에도 봉기는 계속 되었지만 무력에 의해 진압되었고 독일은 종전과 다름없는 분열과 전제정으로 복귀하였으며, 통일을 얻기 위한 노력은 한세대 뒤로 연기되었다. 





프로이센의 왕 빌헬름 4세의 일화에 따르면 프랑크푸르트 의회에서 주는 왕관은 개돼지가 주는 왕관이라고 해서 거절했다고 합니다. 어디 평민따위가 왕에게 왕관을 주는가?에 따른 반발이라고 생각됩니다. 아마 그 시대의 왕과 평민의 계급차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인데요.




결론은 프랑스 2월 혁명을 보고 독일도 따라했지만 실패했다입니다.  다음 포스팅은 2월 혁명에 영향을 받은 이탈리아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흥미있게 읽은 글



이 글을 공유합시다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