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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2월 혁명의 원인과 경과 정리



7월왕정은 부르봉 복고왕제에 비하여 자유주의적이고, 선거권도 화대되었으나, 그것은 은행가, 대상공업자, 그리고 일부 부농에 한정된 것이었다. 1847년부터 1848년에 걸쳐 프랑스에는 농업과 공업 부문에 공황이 발생하고 물가고와 실업자 수가 증가되는 등 심각한 경제위기가 발행했다. 



그러나 7월 왕정의 정책은 유산계급에 유리하고 노동자들에게는 불리하였다. 당시 7월 왕정은 "소수 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운영되는 주식회사"에 비유되었는데, 내각수반인 기조는 "참정권을 얻으려면 돈을 벌라"는 냉담한 말로 재산자격에 의한 제한선거제를 옹호하였다.



이러한 7월 왕정에 대한 불만은 선거권 확대 요구로 집약되었다. 1846~ 1847년에 걸친 흉작은 공업에 파급되어 전반적 경제위기를 가져왔으며, 도산과 대량실업이 속출하고 보수적 기조 내각의 사퇴와 선거권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7월 왕정의 몰락



보통선거권 획득을 위한 선거법 개정을 위해 각처에서 이른바 '개혁연회(banquest of reform)'가 개최되고 2월 22일에는 파리에서 대규모의 연회가 계획되었다. 기조 내각은 이를 금지했지만 파리에서는 연회 대신 학생과 노동자들이 시위가 벌어지고 23일에는 소상점주와 수공업자 등 소시민층이 가세하였다. 





2월 24일 시청이 점령되고 왕의 거처가 습격을 받자 '평민왕'을 자처하던 루이 필립은 왕위로부터 물러나 영국으로 망명했고 시인 라마르틴을 수반으로 하는 새로운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7월왕정의 붕괴와 더불어 새로 조직된 임시정부는 부르주아지 출신의 온건파가 다수를 차지하였으나 노동자계급을 대표하여 사회주의자도 참가하였다. 사회주의자들의 주장으로 노동권 보장과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가 인정되고 실업자 구제를 위한 '국립공장'의 건설도 추진되었다. 



◎보통선거의 시작





하지만 임시정부의 급격한 사회개혁과 노동자들의 정치참여는 유산자 시민계급과 농민들을 불안하게 하여 사회주의를 외면하게 만들었다. 온건파가 주도하는 임시정부는 노동자들을 달래기 위해 제헌의회선거를 실시했는데, 4월에 실시된 이 선거는 성년남성이 참여한 '유럽 역사상 최초의 보통선거"였다. 





의원 선거는 부르주아지와 농민들의 제휴에 의한 온건 공화파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 9백명의 위원 가운데 8백명이 온건공화파에 속했다.



파리에 노당자와 사회주의자들은 5월 15일 의사당에 침입하여 의회의 해산과 새로운 임시정부 수립을 요구하는 등 선거 결과에 강하게 반발하였다. 이들 6월 국립공장이 폐쇄되자 바리케이트를 쌓고 폭동을 일으켜 맹렬하게 저항했지만 6월 23일 ~26일의 카베냑 장군의 군대에 의해 진압되었다.




프랑스의 최초의 대통령 루이 나폴레옹





6월 폭동 후 파리에는 계엄령이 실시되고 계엄 하에서 새로운 공화주의 헌법이 발표되었으며 1848년 12월에는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었다. 선거결과 나폴레옹 1세의 조카인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2월 혁명을 주도한 공화파를 제치고 550만표라는 압도적인 다수표로 신생 공화국의 대통령이 되었다.(제2공화정)




7월 혁명과 2월 혁명은 서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고 또한 유럽사에서 역사적으로 매우 중여한 사건이었습니다. 


보통선거라는 유럽 최초의 성인 남성들의 참정권을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다음 포스팅은 2월 혁명의 영향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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