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씽씽의 역사자료실

빈체제에 대해 정리해 볼까요?


나폴레옹이 전쟁에서 패한 뒤 공공의 적이 되어버린 프랑스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메테르니히라는 오스트리아 재상은 빈체제를 어떻게 이끌어 나갔을 까요? 빈체제에 대해 성립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빈체제의 성립



프랑스의 팽창주의가 나폴레옹의 패배로 막을 내린 뒤, 1814년, 프랑스와의 전쟁을 이끌었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러시아 영국등 유럽의 열강은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 모여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한다.'



신성한 정통성의 원리


빈회의를 지배한 정신은 '신성한 정통성의 원리'였는데 이는 혁면 전의 상태를 정통적인 것으로 보고, 그 상태로 돌아가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구질서의 단순회복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유럽에서 새로이 대두된 자유주의와 민족주의를 철저히 탄압하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혁명운동을 탄압하고 강력한 보수적 지배체제를 수립하는 한편 축출된 국왕들을 복위시키며 각국간의 국경을 확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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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체제의 각국의 이해관계 정리



①러시아 - 폴란드를 얻고 폴란드왕국을 세우고 러시아황제가 그 왕위를 겸한다.


②프로이센 - 작센의 북부와 라인지방 획득


③독일 -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중심로로 39개국으로 구성된 독일연방이 되었다.


④네덜란드 - 벨기에를 얻어 네덜란드왕국 성립


⑤오스트리아 - 벨기에 포기 대신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 획득


⑥영국 - 몰타섬, 케이프식민지, 세일론 획득




빈회의를 통해 유럽에서는 절대왕정을 유지하고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적 혁명에 반대하기 위한 열강들의 복고적 성격의 협력 체제가 나타나는데, 이를 빈체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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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회의를 주도한 메테르니히



신성동맹과 4국동맹은 빈회의의 결과를 최씽씽의 역사자료실 유지하기 위해서는 무력을 사용할 수 있다는 내용이 포함된 상호간의 조약으로서 빈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실질적인 국제기구 구실을 하게 되었다.




이처럼 빈체제는 프랑스 혁명의 이념인 자유와 평등을 말살하고 전통적인 옛 체제를 복구하고 유지하기 위한 거이었다. 나폴레옹에 의해 폐위된 왕이나 왕조는 모두 부활되었으며, 각국의 자유주의 민족주의 운동은 억압되었다.



동맹국들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그 밖의 국가나 민족의 이해는 무시되었고, 독일, 이탈리아는 분열상태로 머물게 되었다. 또한 군대와 비밀경찰을 동원하고, 대학에 감독관을 파견하며, 언론 검열제도를 강화하는 등 프랑스 혁명이 가져온 자유주의와 민족주의의 확산을 막으려 했다.



빈체제의 저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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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체제의 억압 속에서도 자유주의적, 민족주의적 혁명운동을 완전히 소멸시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빈체제에 대한 저항은 1820년 초부터 유럽 각국에 나타났다.



1818년 아헨에서 열린 국제회의에서 메테르니히는 현재의 질서가 절대로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2년도 지나지 않아 각국에는 혁명세력이 반란을 일으켰다. 1820년에는 포르투갈과 에스파냐, 두 시칠리아 왕국에서 시작되었으며 그 주도세력은 지식인과 중산층, 군인이었다. 또한 러시아에서는 알렉산드르1세가 사망하자 자유주의적 귀족과 장교들이 중심이 되어 데카브리스트의 반란이 일어났다.



또한 여러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이탈리아에서도 나폴리왕국의 카르보나리당의 비밀결사운동, 피에몬테의 자유주의 운동이 전개되었다. 메테르니히는 프랑스와 함께 무력간섭을 단행하여 이탈리아에는 오스트리아가, 에스파냐에는 프랑스가 각각 진주하여 자유주의 운동을 진압하였다.



이처럼 1815년 ~ 1830년 사이 빈 반동체제에 대한 자유주의 운동은 계속하여 탄압을 받았지만 그것이 완전히 말살 될 수 없었으며 이제 빈체제는 유럽대륙의 외부로부터 먼저 타격을 받고 붕괴되기 시작했다.



빈체제에 대한 정리는 이쯤에서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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