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씽씽의 역사자료실

세종대왕의 업적 완벽정리(2)-법전, 영토확장, 불교

 

안녕하세요. 세종대왕의 업적에 대한 두번째 포스팅입니다. 첫번째 포스팅 이후 두번째 포스팅을 바로 이어서 써야하는데 깜빡잊고 있다가 생각이 나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애민의 군주이자 조선왕조500년의 기틀을 세운 세종대왕은 그 업적도 어머어마해서 한번에 정리하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저번 글은 유교정치와 서적편찬, 과학기술에 대해 포스팅을 했다면 이번 포스팅은 법전 정리와 영토확장, 불교정책에 대해 적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전 포스팅은 밑에 링크로 달아놓겠습니다.

https://ceaser5712.tistory.com/317

 

세종 대왕의 업적 완벽 정리(1)- 유교정치,서적편찬,과학기술 발전

세종 대왕의 업적에 대해 완벽 정리(1) - 유교정치, 서적편찬, 과학기술 발정, 훈민정음 안녕하세요. 이번 포스팅은 세종 대왕의 업적에 대해 정리해 볼까 합니다. 세종대왕이란 이름은 널리 알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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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포스팅과 이어서 보시면 되겠습니다.

1.법전을 정리하다

조선의 법전

조선시대 초창기에는 아직 고려의 영향으로 불교가 백성들에게 영향을 주고 있었습니다. 조선을 건국한 사람들은 유학자들이어서 고려와 다른 유교국가를 원했습니다. 조선 건국 후 정도전을 시작으로 태종을 거쳐 세종 때 유교적 민본주의와 법치국가로서의 기틀이 완성되었습니다.

 

특히 세종이 즉위할 때부터 법전 정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종 4년에 법전편찬을 위한 기관으로 육전수산책을 설치하여 속육전 편찬에 세종이 직접 참여하였습니다. 그리고 세종 8년에 속육전 6책과 등록 1책이 완성되었습니다. 7년 뒤 세종 15년에는 신찬경제속육전 6권과 등록 6권을 편찬하였습니다. 그 후 속육전은 학자들이 검토하고 개수하여서 세종 17년에 속육전 편찬이 완료되었습니다. 이후 법전은 성종대에 경국대전으로 조선의 법을 완성시키게 됩니다. 

 

세종은 형벌제도를 정비하였습니다. 형벌제도란 죄를 지었을 때 사람에게 주는 벌인데 고려시대 형벌제도가 너무 잔인하여 명확하지 않아서 이를 정비하였습니다. 세종의 형벌 정비의 예시로는 법률조항이 없을 경우 법의 적용을 신중히 해야 할 것, 죄인을 고문으로 사망하지 않게 할 것, 사형죄는 세 번에 걸쳐서 심의할 것 등의 의금부삼복법을 정하였습니다.

 

또한 16세 이하와 71세 이상은 강도나 살인이 아닌 이상 감옥에 구속하는 것을 못하게 하고

9세이하에서 81세 이상은 죽을 죄를 지어도 옥살이를 면해주었습니다. 죄를 지은자의 부모가 71세 이상이면 부모의 소재지에서 징역을 살도록 하였습니다.

 

세종 21년에 구체적인 조옥도를 각 도에 배포하였습니다. 조옥도란 감옥의 건축양식입니다. 감옥을 건축할 때 구체적인 설계도를 반포하여 남자의 감옥, 여자의 감옥, 추운지방의 감옥, 따뜻한 지방의 감옥에 대해 구분하여 설계를 하였습니다. 세종 30년에는 감옥에 갖힌 죄인들을 위해 더위와 추워를 막고 위생관리를 명령하는 법을 배포하였습니다.

 

마지막으로 세종은 세법을 정비하였습니다. 이 부분은 수능시험에 꾸준히 출제되고 있는 부분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세종 18, 세종은 백성의 세금을 덜어주기위해 세법을 정비하는 공법 상정소를 설치했습니다. 세종은 공법상정소에서 집현전 학자들과 연구를 해서 세종 26년에 공법을 만들었습니다. 공법의 내용은 토지의 질에 따라 세금을 달리 징수하는 전분육등법과 날씨와 농자의 풍흉에 따라 세금을 다르게 징수하는 전분구등법 그리고 결부법으로 정리되었고 이것은 조선시대 조세의 기본이 되었습니다.

 

2. 국토를 개척하다

4군 6진의 위치
6진의 모습
김종서 장군의 묘

세종은 국토를 넓히고 보호하는 일에도 관심이 있었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와 중국의 경계선인 두만강과 압록강은 이때 개척된 것입니다. 한국사 교과서에 나오는 46진의 개척이 바로 그것입니다. 김종서 장군을 두만강에 보내 육진을 개척하였고 압록강에는 4군을 설치하여 압록강과 두만강을 경계로 그 이남지방을 조선의 영토로 편입하였습니다.

 

위로는 압록강과 두만강을 개척하고 밑으로는 일본을 견제하였습니다. 조선 초에는 건국 후 어수선해서 남해안 지방에 일본해적들 즉 왜구들이 우리나라를 약탈하는 횟수가 많았습니다. 세종 1년에 세종은 이종무를 시켜서 왜구들의 본거지인 대마도를 공격하여 정벌하였습니다. 그리고 강경책과 함께 회유책으로 세종 8년에 진해의 내이포, 부산포, 울산의 염포 이렇게 삼포를 개항하고 세종 25년에는 계해약조를 맺어 일본인들을 회유하였습니다.

3. 불교정책

고려는 불교의 나라로 불교가 융성하였지만 고려 말에는 불교의 폐단이 심해져서 유학자들에게는 타도의 대상이었습니다. 정도전을 대표로 하는 유학자들이 건국한 조선은 불교를 말살하는 정책을 하였습니다. 숭유억불정책으로 태조 이성계의 오른팔인 정도전을 시작으로 태종 이방원대에는 더욱 더 강화되었습니다. 세종 초에는 선대의 숭유억불정책을 따랐으나 기우나 구병, 명복 등을 위한 행사들은 옛것을 따라 불교식으로 시행하였습니다.

 

세종은 백성들의 삶에 불교가 깊이 새겨져 있어서 불교를 쉽게 없앨 수 없다고 판단하여 불교를 없애는 것 보다 정리하는 방법으로 불교를 정비해 나갔습니다. 세종 1년에 사사노비 즉 국가가 절에 하사한 노비들을 없애고 노비들을 모두 국가에 귀속시켰습니다. 또한 불교의 양대 종파 교종과 선종을 하나로 병합하고 절을 정리하여 교종, 선종 양종파에 18사씩 총 36개의 절만 본사로 인정하고 나머지 절은 정리하고 토지를 국가가 몰수하였습니다. 그리고 궁궐 내의 연등행사를 폐지하였습니다.

 

하지만 불교를 억압만 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세종 14년에 효령대군이 한강에서 수륙재를 행하는 것을 허락하고 세종 28년에는 왕비 소헌왕후가 죽자 신하들이 반대하였지만 불경의 금서와 전경법회를 시행하였습니다. 세종 30년에는 내불당을 세웠습니다. 이는 세종이 왕후가 죽으면서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았고 또한 자신의 건강이 악화되면서 불교에 관대해지는 계기가 되었을 것이라고 추측이 됩니다.

 

4.세종의 역사적 의의

세종대왕

세종대왕을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애민의 군주였습니다. 왜 조선의 역대 왕들 중에서 묘호가 세종이고 대왕이라는 명칭을 붙였는지 세종의 업적을 보면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은 세종대에 기틀이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세종 개인이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 인적등 모든 여건에 관심을 가지고 국가와 백성을 생각하였기에 이렇게 많은 업적이 나왔을 것입니다. 세종은 묘호 이고 시호는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이고 능호는 영릉이고 영릉의 위치는 여주시 능서면 영릉로에 있습니다. 지하철 역이 있기 때문에 편리하게 방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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