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씽씽의 역사자료실

. 사초와 실록의 열람

 

실록과 사초의 기록을 누구도 임의로 볼 수 없다는 원칙론은 조선왕조 전시기를 통하여 공론으로 확립되어 있었다. 태조는 원칙적으로 사초를 열람할 수 없다는 반대에도 불구하고, 동왕 4년 당 태종의 고사를 본받아 즉위 이래의 사초를 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 7년 윤 5월에는 즉위 이래의 사초를 바치도록 명하였으며, 같은 해 6월에는 사초를 골라내도록 하였다. 그렇지만 이런한 예를 제외하고는 엄격하게 사초가 관리되었으며, 세종 31년에는 춘추관 소장의 사초에 관한 엄격한 防禁조칙이 내려졌다


한편 연산군대에 金馹孫의 사초를 대전에 들여오도록 하였으며, 이에 李克墩은 김일손의 사초중에 6조만을 발췌하여 올렸다. 이로 인해 戊午士禍가 발생하였으며, 이와 같은 사초의 열람이 가져온 혼란 때문에 중종대 이후부터는 더욱 엄격하게 그 열람이 제한되었다.


이와 함께 실록의 열람도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작성, 봉안, 고출, 포쇄할 때는 장중한 의식과 함께 행하여졌다. 불가피하게 실록을 열람하여야 할 경우에는 반드시 사관으로 하여금 사고에서 꺼내도록 하였다. 실록을 열람할 때에는 겸춘추관직을 맡은 당상관 1인과 한림1인이 함께 갔으며, 당상이 유고시에는 한림이 혼자 가도록 하였다. 


실제로 조선 초기에는 당시 완성된 실록을 왕이 열람하려고 하였으며, 그것이 이루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연산군 4년 무오사화 이후 연산군이 편찬중인 실록을 보고자 하였으나 사관들의 반대로 열람하지 못하였으며, 중종 이후에는 더욱 엄격하게 왕의 실록열람이 금지되었고, 承政院日記의 열람까지도 금지되었다.


한편 실록의 포쇄는 式年에 따라 3년에 한번씩 ,,,未年에 하도록 하였으며, 한림 1인이 파견되어 일정한 규레에 따라 시행하였다. 그리고 실록을 봉안할 대에도 내사고에는 實錄廳 總裁官, 堂上, 都廳郎廳 등이, 외사고에는 奉安使(춘추관 당상)從事官(춘추관 기사관), 觀象監員 胥吏, 庫直, 營吏 등이 동행하여 봉안하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이 글을 공유합시다

facebook twitter kakaoTalk kakaostory naver 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