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왕조실록의 편찬과 보관
가. 조선 적기의 실록편찬
조선시대 실록은 고려시대와는 달리 왕이 죽은 후 바로 편찬되었따. 그리고 이런한 실록편찬의 관례에 따라 태조 7년에는 공민왕 이후의 실록이 편찬되었다. 그리고 태종 8년에 태조가 죽자, 태종은 이듬해에 《태조실록》은 領義政兼領春秋館事 河崙의 적극적인 주장과 기사관들의 ‘ 삼대가 지난 다음의 실록 편찬’ 주장이
대립한 가우데 이루어진 것으로, 결국《태조실록》은 태종 10년에 춘추관의 주도로 편찬되기 시작하여, 태종13년에 완성되었다. 이는 조선의 건국과정에서 여러 정치적 사건의 기술에 관한 태종의 관심과 이에 대한 직접적인 개입 의도가 있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편찬관례는 이후 조선왕조의 역대실록에도 그대로 적용되어, 역대 왕의 실록편찬이 왕이 죽은 후 곧바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실록편찬의 관례와 함께 실록 내용에서도 고려시대와 달리 사론이 실리지 않는 변화가 생겼다. 특히 왕의 비행, 비례, 신하들의 언행에 관한 사론은 거의 실리지 않게 되었다. 비록 그러한 사론이 사관들의 사초에는 작성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실록편찬의 원칙을 춘추관의 당상이 정하였으므로, 그들은 사관들이 사초에 작성해 놓은 사론을 실록을 편집할 때 넣지 않는 원칙을 고수한 것으로 여겨진다.
즉 실록편찬자들이 왕이 죽은 후 곧바로 편찬되어진 실록에서 왕을 비판하는 사론을 취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조선 초기의 건국작업을 마치고 문물의 경비를 통해 안정기를 이룩한 이후 사론이 생겨나기 시작하였다. 사관들의 사론이 실록에 전재되기 시작한것은 《세조실록》부터였으며, 취사하였던 것으로 여겨진다.
그리고 성종대에는 사관들이 사론을 쓰는 풍조가 활발하였다. 그것은 《성종실록》에 487편의 사론이 실려 있는 점에서 알 수 있으며, 그 이유는 당시 사관들의 비판의식이 강해졌다는데 있다. 이는 사관들의 지적 분위기가 성숙되었다는 점과 당시 훈구파들이 정치를 주도하면서 비리를 자행한 정치현실이 서로 괴히되었기 때문에 나타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들 사관들의 사론은 대부분 인물에 관한 유교적, 도덕적 관점에서의 평가였으므로 이후 정쟁의 불씨를 낳게 되었다.
나. 실록의 보관
고려 초기부터 여러 사서와 전적의 보관을 위해서 서울의 史 館에 사고를 설치하여 보존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고종 14년(1227) 9월 당시 《명종실록》을 추찬하여 사관과 海印寺에 각각 보관하도록 하였는데, 이것이 고려시대 외사고의 설치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몽고족의 침입으로 내사고는 강화도로 옮겨졌고 다시 여러 곳을 전전하였다.
태종 5년(1405) 9월 한양천도와 더불어 같은 해 10월 2일 景福宮 근정전 서랑에 봉안되어 조선의 내사고로 자리잡았다. 외사고는 해인사에 실록이 봉안된 이후 몽고의 침입으로 彰善島로 옮겨졌다가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珍島 및 내륙으로 옮겨져 공양왕 2년(1390) 忠州 開天寺에 자리잡아 조선왕조의 충주사고가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고려시대의 사고제도를 계승하여 내외 양사고를 두었다. 태종 5년 한양천도로 경복궁에 자리잡았던 내사고는 태종 13년 思勳閣 齋宮으로 옮겨졌다가, 세종 22년(1440)에 춘추관이 경복궁내 尙瑞院의 서쪽에 자리잡게 되면서 독립된 사고를 갖추게 되었다. 조선 초기에는 외사고에 선대실록이 봉안되었으므로, 외사고의 중요성이 강조되어 확충이 건의되었다.
그리하여 세종 21년에 사헌부의 상소를 받아들여 경상도 성주와 전라도 전주에 사고를 설치하였으며 세종 27년에는 태조, 정종, 태종의 3대실록 4본을 만들어 1본은 춘추관의 실록각에, 3본은 충주, 전주, 성주의 사고에 분장토록 하여 조선 초기의 「4대사고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조선 전기의 사고는 대부분 성내 또는 관아 부근에 위치하고 있어, 조선 후기의 외사고들이 전부 깊은 산간의 사찰과 관련하여 만들어졌던 것과는 달랐다. 조선 전기의 외사고로서 충주사고는 客館의 동남에, 성주사고는 객관의 동북에, 전주사고는 성의 남문안에 있던 慶基殿의 동쪽 담안에 있어, 궁중에 있던 내사고와 마찬가지로 모두 성내의 객관이나 외방궁실 근처에 있었다.
사고의 구조에 대해서는 조선 전기의 경우 구체적인 자료가 없어 잘 알 수는 없으나, 승려와 관계된 구조물은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중종 33년(1538) 11월 성주사고에서의 화재사건을 다루는 관정에서 사각의 모습을 일부 엿볼수 있다. 즉 사고의 건물은 2층으로 되어 있으며, 아래층은 넓게 되었고, 동위에 사다리가 놓여 있어 2층으로 올라갈 수 있게 되어 있으며, 전통의 주위에는 담을 쌓았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그리고 사고의 관리는 조선 초기에는 守護官 5인, 別色戶長, 記官, 庫直 각 1인을 두어 관리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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