택리지(擇里志)
조선시대 1751년에 실학자 청담(淸潭) 이중환(李重煥: 1690~1756)이 저술한 지리서로서 ‘박종지(搏綜誌)’라고도 한다.
<팔도총론(八道總論)>과 <복거총론> 2편으로 나누어서 서술하였는데 <팔도총론>에서는 전국을 8도로 나누어 그 지리를 논하고 그 지방의 지역성을 출신인물과 결부시켜서 밝혔고, <복거총론>에서는 살기 좋은 곳을 택하여 그 입지조건을 들어 타당성을 설명하였다. <팔도총론>은 지방지(地方誌)에, <복거총론>은 인문지리적 총설에 해당된다. 사람이 살 만한 곳의 입지조건으로서 지리(地理), 생리(生利), 인심(人心), 산수(山水) 등 4가지를 들었다.
내용 여러 곳에 풍수지리설이 인용되었으며 이 책의 특징으로는 ①한국사람이 저술한 현대적 의미의 지리서라는 점, ②실생활에서 참고와 이익을 주도록 저술된 점, ③근대 한국의 지리학과 사회학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점을 들 수 있는데, 이것은 오늘날 외국에서도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붕당정치의 폐해
조선에서의 붕당 정치란 지방별 이해 관계, 학문 계통에 따른 견해 차, 연령 직위의 고하에 따른 서국관의 차이 등에서 서로 입장을 같이하는 인물끼리 집단을 형성하여 정치하는 것을 말한다. 조선 시대에는 성리학이 그 대종을 이루어 김종직, 김굉필, 정여창, 김일손, 조광조 등에게 계승되었는데, 이들 사림 세력은 조정의 신진 세력으로 부각되어 중앙의 훈구세력과 매사에 대립하게 되었다. 적극적인 혁신의 뜻을 품고 부패한 기성 세력에 대한 맹렬한 공격을 시작하자 대항할 만한 이론을 미처 정립하지 못한 훈구 세력은 국왕을 통하여 사림 세력을 탄압하기에 이르렀다. 즉, 1498년 무오사화에 이어 갑자, 기묘, 을사사화 등이 연쇄적으로 발생하였다. 훈구 세력의 과도한 권세에 불안을 느낀 국왕은 왕권의 신장을 위하여 사림세력과 손을 잡게 되었고 그 결과 선조 초기에는 정권이 사림 세력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붕당정치는 사림이 정계를 장악한 이후 관직에 오를 수 있는 자격자의 수에 비해 관직의 수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작되었는데, 붕당의 직접적인 시작은 1575년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반목에서 비롯되었다. 즉, 전랑직은 정 5품의 낮은 관직이었으나 인사권을 갖고 있으며 전임자가 후임자를 추천하면 공의에 부쳐 선출되었음로 관료들 간의 집단적 대립의 초점이 되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김효원을 중심으로 한 동인이 우세하여 심의겸을 중심으로 블로그복사방지용한 서인을 공격하였으나 동인은 다시 강경파인 북인과 남인으로 분파되었고 왜란 후에는 남인 유성룡의 실각을 계기로 북인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그러나 득세한 북인은 다시 선조의 후사 문제로 대북과 소북으로 나뉘어 대립하다가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대북파가 정권을 장악하고 영창대군을 모함, 살해하는 등 소북파 제거에 나섰다. 이후 인조 반정으로 천하는 서인의 수중으로 들어갔으나 남인 이원익이 입각하게 됨으로써 서인과 남인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대립이 계속되었다. 현종 때에는 1, 2차 예송 논쟁을 거쳐 남인이 일시적으로 재집권하게 되었는데, 이들은 그 전횡이 심하여 집권한 지 몇 년 만에 쫓겨나서(경신환국)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이 재집권하였다. 그러던 중 1689년 이른바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재 등용되었고, 1694년에는 서인이 재등용되는 갑술환국이 벌어졌다.
붕당은 처음에는 학문과 이념의 차이에서 출발하였으므로 그 폐단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정치의 활성화와 정치 참여의 폭을 넓히는데 기여하였으며, 정치 세력 간의 상호블로그복사방지 비판과 견제의 기능도 가졌다. 17세기에 서인과 남인이 공존하면서 정책 대립을 펼친 것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러나 권력의 독점적 추구와 외척 세력의 개입으로 붕당 정치는 변질되어 갔다고 경신환국 이후에는 붕당 정치의 기본 원리가 무너지고 일당 전제화 추세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정권은 몇몇 벌열가문(閥閱)에 의해 독점되었고 지배층 사이에서는 개인이나 가문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또 양반층이 분화되면서 권력을 장악한 부류가 있는가 하면 다수의 양반은 몰락하여 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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