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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왕의 전제왕권 확립


 신문왕대는 무열왈대부터 시작된 신라의 전제 왕권이 확립된 시기이다. 신문왕은 즉위 직후 김흠돌의 모반 사건을 계기로 대대적인 귀족 세력의 축출을 단행하고, 전제왕권의 확립을 꾀하였다. 김흠돌은 신문왕의 장인으로서 당시 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의 지위에 있었는데, 뫈이 발각되어 많은 귀족들과 함께 정치적인 숙청을 당하였다. 682년에 동해에서 얻었다는 만파식적은 일체의 정치적 불안을 진정시키려는 왕실의 소망이 담겨 있었던 것이다.

이어서 신문왕은 유교적 정치 이념에 입각한 인재의 교육과 양성을 목적으로 하는 국학을 설립하고, 삼국을 통일하면서 증대한 중앙 관서의 업무와 확대된 영역의 지방 통치를 위한 제도 정비를 이룩하였다.

 

우선 682년에 위화부령 2인을 두어 인재 등용에 관한 업무를 관장하게 하고, 공작부와 예작부를 설치하여 중국의 6전조직과 비슷한 정무 분담 체제를 완비하였다. 특히, 685년에는 각 관부에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사지가 설치됨으로써 문무왕대에 설치된 말단 행정 담당자인 사와 아울러 영, 경, 대사, 사지, 사의 5단계 관직 제도가 완성되었다.

 

한편, 신문왕은 지방 통치를 강화하기 위해 9주5소경을 정비하였다. 소경은 왕격인 금성(경주)이 지역적으로 치우쳐 있는 결함을 보완하고 지방의 균형 있는 발전을 꾀하기 위해 설치되었다. 아울러 삼국 통일 후의 확대된 영역을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지방을 9주로 나누고 군현을 정비하였으며, 각 주에는 10정을 고루 나누어 배치하였다. 또, 중앙에는 신라인을 중심으로 고구려, 백제, 보덕국 및 말갈인을 두루 포섭하여 9서당을 정비하였다.

 

내외이 관제 정비와 짝하여 689년에는 귀족들에게 지금하던 녹읍을 폐지하고 관료전을 지급하여 관리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이로써 녹읍을 통한 관리들의 경제력 확대를 억제하고 , 전제 완권을 보다 강화할 수 있었다.


 



집사부 


 


집사부는 신라시대의 최고 행정 기관으로 국가의 기밀 사무를 맡아 보았는데, 651년 (진덕여왕5) 품주를 개칭하여 설치하였다. 집사부의 장관은 진골 출신의 중시로, 그 아래 전대등, 대사 , 사자 2명, 사 14명이 있었다. 


 집사부는 국가의 기밀 사무를 맡았던 만큼 왕의 지배를 직접 받았으며, 따라서 화백회의와 귀족 세력의 대표자격인 상대등과는 대립적인 성격을 띨 수 밖에 없었다. 통일 직후 왕권이 전제화되었을 때에는 집사부의 권한이 강화되었고, 그 반대로 상대등의 권한은 약화되었다. 

 

집사부의 장관인 중시직에는 왕과 가까운 왕족이 임명되었고, 그 임무는 왕권을 옹호하는 행정적인 대변자인 동시에 정치적 책임자의 역할을 하였다. 중시는 747년 (경덕왕6)에 시중으로 격상되었고, 829년(흥덕왕4)에는 집사부가 집사성으로 승격되었다. 이것은 집사성이 점차 여러 관부를 총관하도록 기능이 확대된데서 생긴 변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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