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씽씽의 역사자료실

대한 제국의 개혁




대한 제국은 외세 의존적인 갑오개혁을 반성하고, 국가의 완전한 자주 독립을 지향하는 개혁을 추진하였다. 개혁의 내용은 1899년에 마련한 '대한국 국제'에 잘 나타나 있다.

 

정치면에서는 황제권을 가화하여 황제가 모든 권력을 독점하고 왕실 재정을 확충할 수 있게 하였다. 중앙과 지방의 군사 제도를 개혁하여 군사력의 증강을 꾀하였다. 서울의 친위대를 증강하고, 시위대를 창설했으며, 지방의 진위대를 늘렸다. 외교면에서도 자주권을 지키려 하여, 연해주와 간도 지방의 교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와 북간도의 영코 편입을 시도하였다.

 

결제면에서는 양전 사업을 실시하여 근대적 토지 소유권 제도인 지계를 발급하였고, 상공업 진흥책을 적극 추진하였다. 정부에서 제조 공장을 설립하거나 민간 제조 회사의 설립을 지원하였으며, 유학생을 해외에 파견하거나 기술 교육 기관을 설립하여 근대적 기술을 습득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근대적 회사와 실업 학교들이 설립되었으며, 과학 기술을 응용한 각종 기계나 선박 등이 제조되었다. 또, 경제 생활의 기준이 되는 도량형을 통일하였고, 통신, 교통 시설의 개선, 우편망 확충, 전화개설 등도 이루어졌다.


사회적인 면에서는 호적제가 시행되고 순회 재판소가 설치되었으며, 종합 병원인 제중원과 구휼 기관인 헤민원 등이 설립되었다.


이러한 개혁은 기본적으로 구본신참을 이념으로 한 복고적인 성격을 가지며, 재정적 뒷받침 없이 추진되었다는 점, 민중의 경제 생활과 국가 재정을 희생시키고 왕실 재정을 개선하였다는 점, 철도의 부설 등이 외국인에게 특허되어 그 기술과 자본에 의하여 이루어졌다는 점 등이 한계로 지적된다. 그러나 국가의 자주 독립과 근대화를 지향하여 비교적 외세의 간섭 없이 자주적으로 추진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있다.


 




위정 척사 운동의 성격




19세기에 이르러 서양 세력이 진출해 오자 이에 대응하여 주권을 지키기 위해 서양 문물을 거부하고 전통 체제를 수호하는 위정척사 운동이 모색되었다. 위정척사란 '바른것을 지키고 사악한 것을 무리치자' 는 뜻이다.'바른것'은 전통적인 성리학적 사회질서이고 '사악한 것'은 서양 문물을 뜻한다.

위정척사 운동은 문호 개방 이후 개화 사상이 고조되고, 정부의 개화 정책이 외세의 침투에 주체적으로 대처하지 못한다는 위기 의식에서 비롯되어 주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유생들에 의해 주도해 나갔다. 그 논리 및 운동은 외세의 침투 상황에 따라 단계적으로 전개되었다.

 

개항 이전인 1860년대에는 서양과의 교역을 반대하는 통상 반대 운동을 전개하고, 서양의 무력 침략에 대항해서는 척화 주전론을 주장하여 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을 뒷받침하였다.


1870년대의 문호개방을 전후해서는 서양 세력과 일본은 마찬가지라고 보는 왜양일체론과 개항 불가론을 들어 개항을 반대하였다. 일본은 이미 서양 문물을 받아들였으므로 서양이나 마찬가지라는 이유로 일본에 대한 개항을 반대하였다.


1880년대에는 정부의 개화 정책 추진과 [조선책략]의 유포에 반발하여 개화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이만손을 비롯한 영남 지방 유생들이 주도한 영남 만인소로 나타났고, 1890년대 이후에는 항일 의병 운동으로 계승, 발전되었다.


이러혼 위정척사 운동은 외세의 정치적, 경제적 침략성을 잘 파악하여 강력한 반침략, 반외세 운동을 전개하였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그 근본 목표가 조선왕조의 전제적 정치 체제, 지주 중심의 봉건적 유일 사상 체제를 유지하려는 것이었다는 점에서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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